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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엔북스(Issue & Books)

제6회

 

대한민국 국회는 2025년 4월 4일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187명 찬성으로 '12.3. 윤석열 비상계엄을 해제한 대한민국 국민께 드리는 감사문’을 가결하였습니다.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이를 국회 의안으로 명문화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는 ‘감사문’이 65년 전에도 가결된 선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당시 국회는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학생들을 기리고자 4·19 혁명 8일 뒤인 1960년 4월 27일 ‘전국 학도에게 보내는 감사문’을 의결하였습니다. 이 감사문에는 4·19 혁명 당시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맞선 학생들에 대한 감사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전국 학도에게 보내는 감사문 (의안번호 제040511호)

한국전쟁 이후 정부의 부정부패와 경기 침체 등으로 국민의 불만이 켜졌지만, 이승만 정권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 중임 제한을 철폐하며 장기집권 기반을 다졌고, 1959년에는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경향신문》에 대한 폐간명령을 내려 언론을 탄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 후보로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사전 투표 조작, 투표함 바꿔치기 등)를 벌렸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5.4.21. 인용: https://db.history.go.kr/diachronic/)

 

  • 동아일보. (1960.3.16.) 드러난 서울서 무더기 표 계획.

  • 조선일보. (1960.3.16.) 惡夢(악몽)의 밤은 갔건만……港都馬山(항도마산).

4월혁명 기간에 발생한 최초의 민주화운동은 1960년 2월 28일 정부와 여당의 부당한 선거 개입에 항의하며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벌인 학생시위(2.28대구학생의거)입니다. 이후 학원 자유 침해와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해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주도한 3·15마산의거는, 경찰의 폭력 진압 과정에서 8명 사망, 8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 군이 실종되었습니다.

 

김주열 군은 실종 27일 후인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부산일보》는 1면에서 그의 주검 사진을 공개하며 “마산바다 속에서 총 맞은 시체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4.11제2차마산의거)

이 사건은 4월 19일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이 한 장의 사진은 전국민의 분노를 촉발시켜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민주화운동사전. 2025.4.18. 인용: https://dict.kdemo.or.kr/)

 

부산일보. (1960.4.12.) 마산바다 속에서 총 맞은 시체발.

1960년 4월 19일,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의 학생과 시민들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에 돌입했습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경찰과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하는 등 대규모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전국적인 시위와 국무위원 전원 사퇴, 교수단 시국선언 등 연이은 저항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로써 제1공화국은 11년 8개월 만에 막을 내렸으며, 3·15 부정선거는 한국 헌정사상 국회 의결을 통해 무효 처리된 유일한 선거로 남았습니다.

국회본회의 회의록. (1960. 05. 03). 제35회(13차). 대통령(이승만) 사임서 처리의 건.

4·19 혁명은 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혁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1961년 5·16 군사 정변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으나, 헌정질서 재편과 민주주의 제도화의 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4·19 정신’을 헌법 전문에 도입할 것인지, 어떤 의미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1960년 이래 1987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960년 제2공화국 제4차 개헌에서 4·19 정신은 헌법 전문에 도입되지 못하였습니다. 1962년 제3공화국 5차 개헌에서 4·19 정신은 5·16과 동일시되어 ‘5·16 혁명이념’과 함께 헌법전문에 최초로 도입됩니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의 8차 개헌으로 이 내용이 삭제됩니다. 이후 1987년 현행 헌법은 1980년 헌법 전문에서 사라졌던 4월 혁명에 대한 언급을 되살려서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여 ”조국의 민주개혁“의 사명을 완수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서희경, (2011.05.15.). 한국 헌법의 정신사: 헌법전문의 '4·19 민주이념 도입'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정치사상연구, 한국정치사상학회, 제17집 제1호, p.33-58.).

'4·19민주이념'은 국민들의 결연한 저항과 용기로 이루어진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4·19혁명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023년 5월 ‘4·19혁명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는 “4·19혁명은 독재에 맞서 비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이룬 역사적 유산이자 제3세계에서 최초로 성공한 비폭력 시민혁명인 동시에 프랑스의  68혁명(1968), 미국의 반전운동(1964), 일본의 안보투쟁(1960) 등 1960년대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친 기록유산으로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등재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2025.4.18. 인용: https://www.heritage.go.kr)

  • 4·19혁명,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됐다 / KBS 2023.05.19.

  • 4·19 혁명디지털아카이브

4·19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4·19혁명과 소녀의 일기』는 고등학생이 직접 쓴 일기로 4·19혁명 현장의 상황을 기록하였고, 『민주주의 역사 공부1:4·19혁명』은 4·19혁명 당시 주요 사건을 사진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의 한국현대사』는 조직적 선거 조작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4·19혁명의 본질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 도서

  • 4·19혁명

  • 4·19혁명과 소녀의 일기 : 역사의 봄을 되살려 낸 민주주의 이야기

  • 4·19혁명과 민주주의

  • 4월의 소년 : 4·19,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

  • 4월혁명의 주체들

  •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 괴물이 된 권력 :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외침

  •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20

  • 민주를 지켜라! : 4·19혁명 60주년 기념 소설집

  • 사일구

  • 학생문화사,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 4ㆍ19혁명과 소녀의 일기 : 역사의 봄을 되살려 낸 민주주의 이야기

영화 ‘4월의 불꽃’은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의 생생한 기록을 생존자 증언과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하면서, 학생과 시민 주도의 민주주의 정신이 역사적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4·19혁명은 웹툰, 사진, 일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효자동 이발사’와 같은 작품들은 1960년의 치열한 현장을 새로운 시각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 영상

  • [영화] 4월의 불꽃 / [영화]효자동 이발사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15회 [1960년 4·19혁명 김주열 열사 편]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의 희생이 켜켜이 쌓여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의 토대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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