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는 안 된다.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함께 노력하자. 일상의 부조리를 당연한 현실로 여기며 살아가지 말자.' 이런 메시지를 흘려듣지 말고, 개인도 사회도 생명 있는 모든 것도 살아남아 번성하기 위해서는 계속 변화하고 적응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만 '알량한 위선이다, 소영웅주의다, 강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가짜 정의다'라는 인식이 뿌리박히게 된다면(그 인식에 들어맞는 사례가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바로 그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수구꼴통'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주류인 사회는 희망 없는 사회이며, 그 사회의 생명이 다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을 것입니다.(p.107-108)
그 어떤 사회도 나은 입장의 사람들이 못한 입장의 사람들을 위해 어느 정도 양보하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호 이해와 소통, 숙의를 거친 자발적인 양보여야 합니다. 한쪽의 강자가 다른 쪽에서는 약자일 수도 있기에, 시간이 지나며 위치가 바뀔수도 있기에, '다른 경우에는 저쪽이 양보해 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p.208)
'우리'는 암울한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고, 엄혹한 미래로 흘러나가지도 않게 우리가 타고 있는 배를 잘 몰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먼저 대화를 해야 합니다. 혐오 표현은 일반적인 대화를 거부하고 우리끼리만 대화하려는 경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찾는 것 역시 '우리'입니다. 진솔하고 적확한, 그러면서 따스한 대화로 더 큰 '우리'를 만들어 봅시다. 그래서 이 불안한 시대를 무사히 헤쳐나갈 힘을 얻읍시다. (p.251)
혐오를 혐오하면, 혐오가 사라질 수 있을까. 저자는 '틀딱', '맘충', '영포티', '급식충' 등 어느 새 일상 언어 속에 스며든 혐오 표현들을 통해, 이러한 표현들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을 사회구조적으로 날카롭게 파헤쳐 보여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무해’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무심코 사용하는 혐오와 차별의 표현들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는지도 모른다. 혐오는 개인의 인성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며,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을 탓하고 표현을 금지하는 하는 것으로 혐오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저자는 혐오 현상과 표현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를 이해하고, 우리가 처한 사회시스템적 문제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갈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