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어떤 순간에 영화는 내게 잠시 문학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문학비평가이자 작가 제임스 우드는 삶이 헤아릴 수 없는 세부로 가득하면서도 좀처럼 우리의 시선을 그 세부로 이끌어주지 않지만, 문학은 그것을 알아보는 법을 가르친다고 믿었다. 우드의 사유에서 문학의 자리에 영화를 바꾸어 넣으면 이렇다. 영화는 우리를 삶을 더 세심하게 바라보는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삶으로 돌아가 제대로 보는 법을 연습하고, 그리하여 영화 속 세부를 더 잘 보는 독자가 되며, 다시 삶을 더 잘 읽는 독자가 된다. (p. 10)
관계의 고정된 역할을 탈피해 바라본, 사랑하는 이의 진정한 초상에 관해 '애프터썬'은 하나의 완전한 원체험을 제시하는 영화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좁힐 수 없는 시차를 인정하면서도 영화는 결정적 순간에 편집술을 통해 기어코 두 명의 어른이 하나가 되게 만든다. 여름휴가의 마지막 밤, 번쩍이는 스트로보 라이트 속에서 댄스 파티가 펼쳐지고 흥성거리는 인파 속에서 부녀가 춤을 춘다. 빛의 명멸이 혼미하게 느껴질 때쯤, 어느덧 어린 소피의 자리에 현재의 소피가 서서 아버지처럼 적당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다. 서른한 살의 소피 앞에 선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당신, 나와 닮았고 나처럼 속수무책인 어떤 인간이다. (p. 38)
술집, 노동하는 공간과 더불어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의미심장하게 다뤄지는 장소는 극장 앞이다. '데드 돈 다이'를 함께 본 뒤 안사는 홀라파에게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지만, 그녀가 작은 키스를 남기고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 직후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던 홀라파가 그 쪽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영문 제목인 'Fallen Leaves'(낙엽)에서 낙엽보다도 먼저 떨어져 길거리를 외롭게 나뒹구는 것이 두 연인을 이어줄 유일한 서약서인 안사의 전화번호 쪽지라는 것 역시 카우리스마키식의 유머라고 해도 좋겠다. 다행스럽게도 둘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극장 앞에서 재회한다. 종이에 집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고 극장 앞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 표면적으로는 디지털 중심주의에 대한 선명한 반동이면서 - 이것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영화임을 감안할 때 - 우리가 갖지 못하기에 잃지 않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는 말도 되어준다. (pp. 223-224)
우리 삶에서 영화란 무엇일까. 대개 영화를 '삶의 반영'이 아닌 '삶보다 더 큰 무엇'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영화평론가가 쓴 이 책은 '영화를 본 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시네필들 사이에서 '인생 영화'로 자주 오르내리는 영화(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애프터썬, 패스트 라이브즈 外)나 굴지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추락의 해부,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슬픔의 삼각형 外) 중 비교적 최신작들 위주로 소개한 이 책은, 이 영화들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감흥을 남겼는지를 소소한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다. 관객이 우리 인생의 일정 시간을 할애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이 책의 독자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세부'로 가득 찬 우리의 삶을 좀 더 세심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란, 어떤 식으로든 영화를 보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영향을 미치는 그 무엇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가능성의 예술임을 깨닫게 된다.
1부 _ 거울을 보는 일 이토록 다정한 전투 _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흐르는 감각 _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당신이 내가 될 때 _ 「애프터썬」 그러므로 나는 도리 없음을 받아들인다 _ 「패스트 라이브즈」 천국보다 낯선 _ 「콘크리트 유토피아」 돌보는 조연 _ 「더 웨일」 거듭되는 것 _ 「어느 멋진 아침」 그들 각자의 팬티와 고통 _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우리의 가장 좋은 부분 _ 「이처럼 사소한 것들」 사랑도 개발이 되나요? _ 「사랑의 고고학」 끝과 시작 _ 「6번 칸」
2부 _ 어떤 삶이 말하는 것 진실 대신 상처 _ 「추락의 해부」 들르는 감각 _ 「나의 올드 오크」 사랑은 괴리감 _ 「러브 라이프」 (죽지 마) 부활할 거야 _ 「지옥만세」 이름 앞에서 우는 사람 _ 「수프와 이데올로기」 우리 사이의 작고 친절한 것 _ 「말없는 소녀」 내가 사는 집 _ 「센티멘탈 밸류」 살라는 당부 _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외로운 방조자들의 우주 _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3부 _ 이격과 감각 어둠 속에서만 가능한 것 _ 「키메라」 아프다고 말해줘 _ 「세계의 주인」 조금 덜 비겁한 사람이 된다는 것 _ 「아마겟돈 타임」 성장이라는 이름의 생존 _ 「클로즈」 자기혐오의 끝 _ 「서브스턴스」 열리기 위한 문 _ 「스즈메의 문단속」 만신창이 연인 _ 「사랑은 낙엽을 타고」 당신은 나의 당신보다 크다 _ 「클레오의 세계」 냉소와 사랑 사이의 칸 출장기 _ 「슬픔의 삼각형」 4부 _ 장르, 미장센, 숏 사이에서 오래된 무명의 강인함 _ 「기차의 꿈」 잃어버린 캠코더의 모험 _ 「이어지는 땅」 사랑 이야기를 믿다 _ 「3000년의 기다림」 용감한 안녕 _ 「로봇 드림」 후유증 _ 「파묘」 험난한 21세기 관객의 길 _ 「아바타: 물의 길」 술과 목련의 나날 _ 「봄밤」